억대 연봉 종합병원장 관두고 왕진만 하는 동네의원 원장
-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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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연봉 종합병원장 관두고
왕진만 하는 동네의원 문 연 이 사람
지난달 1일 경북 포항시 북구 우창동에 문을 연 병원 ‘내집에서 의원’은 접수 창구는커녕 주사실과 진료실도 없다. 33㎡(10평) 남짓한 공간에 집기라고는 책상 세 개가 전부다. 이곳은 환자가 의사를 보러 오는 병원이 아니라 의사가 환자 집으로 찾아가는 왕진 전문 병원이다.
구자현(55) 내집에서 의원 원장은 3개월 전만 해도 포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종합병원 원장이었다. 게다가 지방 병원에선 보기 드문 혈관 외과 전문의로, 내로라하는 서울의 대학병원 의사도 집도하기 어려운 고난도 이식이나 접합 수술을 척척 해내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구 원장은 억대 연봉의 종합병원장 자리에서 물러나 방문진료만 고집하는 동네의원을 개원했다. 차를 타고 환자 집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해 하루에 볼 수 있는 환자는 다섯 명에서 많아야 열 명이 안 된다. 왕진 교통비는 2만 원이지만 환자 대부분이 저소득층이라 제대로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엑스레이(X-ray) 촬영기나 처방전을 출력하는 프린터기 등도 모두 휴대 가능해야 해서 고정해놓고 쓰는 장비보다 몇 배나 비싸지만 구입해서 들고 다닌다.
구 원장이 적자가 뻔한 왕진 병원을 열게 된 계기는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대유행이었다. 당시 그가 원장으로 있던 종합병원이 코로나19 감염환자 전담병원으로 지정돼 중증 환자들이 강제 입원하면서 그간 여러 사정으로 아파도 병원에 올 수 없었던 환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구 원장은 “과잉진료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건강보험제도가 잘돼 있는 우리나라에서 병원 문턱을 못 넘은 환자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들의 딱한 사정을 들으며 방문진료의 필요성도 절실히 느꼈다. 알고 보니 병원 행정팀 시종화(49) 부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병원 안에 왕진 팀을 꾸리려고 했지만 시도도 못 하고 접었다. 현행 의료법상 방문진료 사업은 동네의원과 같은 1차 의료기관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전국 15개 시?군?구 95곳에 방문진료와 요양서비스를 연계한 재택의료 시범사업을 실시했으나, 이마저도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됐다.
구 원장은 과감히 사표를 냈다. 시 부장도 부원장직을 맡기로 하고 뒤를 따랐다. 방문진료를 하려면 규정상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각각 한 명 이상 필요한데, 시 부원장은 일찌감치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 안성맞춤이었다. 마지막 간호사 자리에는 포항이 고향인 김보람(36)씨가 합류했다.
개원 후 방문진료를 시작한 구 원장이 현장에서 만난 환자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주위 도움 없이는 옴짝달싹 못 하는 와상환자가 대부분이라 온몸에 크고 작은 욕창은 기본이었다. 몇몇 환자는 피부가 어른 주먹보다 더 크게 괴사해 진물과 출혈이 계속 흐르는데도 소독조차 제때 못 받고 있었다. 욕창 환자는 완치까지 최소 몇 주가 걸리지만, 구 원장은 안타까운 마음에 대당 250만 원이 넘는 욕창음압치료기를 한꺼번에 4대 구입해 환자들 몸에 달았다.
이뿐 아니었다. 거동이 불편한 데다 치매까지 심한데도 홀로 지내 밥이나 약도 제대로 먹지 못한 환자가 수두룩했다. 지난 한 달간 치료한 환자는 140명 남짓. 이 가운데 절반이 의료급여수급권자일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또 대부분 독거노인에다 보호자가 있어도 생계 때문에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와 혼자나 다름없었다. 구 원장은 “환자가 전혀 움직이질 못하니 문을 따고 들어가는 집도 있다”며 “구급차를 불러도 이송과정에서 위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고, 부착한 의료장비가 많아 도저히 병원에 갈 수 없는 환자가 생각보다 많았다”고 전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발해 동네의원 일부가 문을 닫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국에도 구 원장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환자들이 왕진 의사가 있는 줄 모르고 아파도 혼자 끙끙 앓고 적절한 치료시기마저 놓칠까 봐 노심초사다. 그러면서도 사명감이 특출한 의사로 비춰지는 것은 경계했다. 그는 “의료 파업을 하든 말든 차 기름값만 있으면 환자를 보러 갈 것”이라면서도 “고령화 속도가 빨라져 방문진료가 시급하다는 판단에 시작한 일이지 대단한 신념이나 의지를 갖고 한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내집에서 의원 덕분에 병원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이 제때 치료받기만 바랄 뿐”이라며 “욕심을 좀 더 낸다면 초고령화 사회에 대비해 재택의료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래서 의사들에게 선생님이란 경칭을 붙여주는 겁니다.